알림
  • 새로운 알림이 없습니다.

[2021 장기요양보험 수기공모 체험수기 우수상] 사랑하는 아버지와 함께 지낸 336일간의 기적 같았던 시간들

  • 2021.10.28 10:44
  • 댓글 0
스크랩

사랑하는 아버지와 함께 지낸 336일간의 기적 같았던 시간들 

 

* 2021년 장기요양보험 수기공모 체험수기 우수상

 

글: 최은희

2020년은 전 세계인의 가슴에 폭풍이 휘몰아치게 한 아픔이 가득한 해이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사랑하는 아버지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먼 곳으로 생의 마지막 여행을 떠나신 해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몇 해 전에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남동생의 간병을 받으면서 와상환자로 지내셨다. 지난해를 막 시작할 무렵,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방문간호사님의 권유로 아버지를 병원으로 모시게 됐고, 담당의사는 병세와 기력, 노화 등등의 이유로 아버지에게 남은 시간이 고작 며칠도 되지 않을 거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이야기를 전했다. 우리는 병원에 머무르는 동안 아버지에게 항생제와 영양제를 투여하는 것 이외에 ‘삶의 마지막 그 날’을 기다리는 침통한 기분으로 2주간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퇴원을 앞두고 병원에서는 “원하는 지역의 요양병원을 연결해줄 수 있으니 그곳으로 모시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3년간 장기요양서비스의 도움을 받아오며 충분히 아버지를 가정에서 보살펴드릴 수 있다는 경험과 확신이 있었던 터라 주저 없이 아버지를 다시 집으로 모셔 오기로 했다.

나는 그 누구보다 더 아버지를 존경하고 믿고 따르며 자랐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인생의 멘토 역할을 톡톡히 해주시던 아버지께서 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신 것도 충격적인 일이었는데, 내 아버지가 곧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다니 이보다 더 가슴을 치는 일이 무엇일까 싶었다.

 

 

 

내가 결혼한 이후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편찮아지기 이전부터 외국에서 지내다가 2018년에 완전하게 귀국을 한 상태였다. 귀국 후 아버지를 뵈러 갈 때마다 중증이신 아버지를 돌보는 동생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는 등의 온갖 마음이 회오리를 쳤었다. 담당의로부터 아버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에 ‘나도 아빠랑 같이 살고 싶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고, 지금이 아니면 ‘절대 다시없을 기회’라는 마음에 조바심이 일었다. 아주 조금의 시간일지라도 아버지에게 남은 시간, 그 짧은 날들만이라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출가외인이라는 이유로 아버지를 모시는 일에서 제외됐던(사실은 배려받았던) 상황을 엎고 가족(형제)들에게 내 마음을 온전히 전달하며 진심으로 설득했다. 신랑도 흔쾌히 안방을 장인어른께 내어 드리자며 나의 마음에 응해줬고,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추억이 성성한 딸아이도 할아버지와의 동거를 반겼다. 나는 그렇게 사랑하는 아버지를 우리 집으로 모시고 왔다.

 

그날이 바로 지난해 1월 17일이다. 아버지는 그로부터 정확히 11개월의 기적 같은 순간들을 선물로 남겨주시고 2020년 12월 18일 새벽, 모두에게 안녕을 고하셨다.

내가 처음 아버지의 병세를 실감한 것은 몇 해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가야한다. 아마도 2016년 가을이었던 것 같다. 1년 만에 한국을 방문해서 찾아간 아버지는 버선발로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듯 어린애 같은 모습으로 달려 나오다가 내 얼굴을 보더니 흠칫하는 표정을 짓고는 어깨를 움츠리며 동생의 뒤로 재빠르게 숨으셨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약간의 의사소통이 가능했던 터라 동생은 며칠 전부터 해외에서 지내는 누나가 집에 올 거라는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해드리며 기억을 상기시켜 드렸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오늘이 바로 그 날이라고 기억하고 계셨는지 “작은누나가 왔다”는 말에 현관 벨소리를 듣자마자 그동안 기다리며 쌓아올린 그리움을 안고 서둘러 앞장서서 나오셨다. 그런 아버지 앞에 둘째 딸은 안 보이고 모르는 사람이 서 있었나 보다. 그렇게 아버지의 눈에는 둘째 딸인 나와 손녀인 내 딸아이가 생소해 보이셨고, 머무는 내내 동생의 등 뒤에 숨어서 힐끗거리며 살짝살짝 우리 얼굴을 살피는 모습이 전부였다. 아버지는 그렇게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며 처음으로 나를 알아보지 못하셨고, 나는 눈물이 앞을 가려 한 해 만에 보는 아버지의 얼굴을 흐릿하게 볼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아버지는 태산과 같은 존재였고 든든한 울타리이며 포근히 기댈 수 있는 안식처였다. 아버지가 알츠하이머에 잠식돼가는 과정은 태산이 무너지고 울타리가 부서지고 안식처가 연기처럼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아버지는 어떠하실까. 아버지를 뵙고 돌아가는 내내 가슴이 먹먹한 것이 하늘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하루하루 병세가 짙어지는 모습을 매일 지켜보면서도 처방약과 식사를 챙기고 몸을 닦아드리는 것만이 해드릴 수 있는 것의 전부인 현실에 동생의 마음은 이루어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한해가 지난 2017년 가을, 아버지께서 전혀 거동을 못 하시고 자리에 눕게 되면서 본격적인 장기요양서비스를 받기 시작했었다. 첫 의뢰업체와의 시행착오를 거쳐 우리 가족은 한 장기요양기관을 만나게 됐다. 그곳을 이용하며 간병을 도맡아 하는 남동생에게 전해오는 소식은 ‘간호사 선생님이 너무 좋으시다’는 것이었다. 인지력이 현저히 무너져 어린아이 같은 반응을 자주 보이던 아버지는 이동은 불가능했어도 뒤척임과 팔다리의 유동은 가능했었다. 자리에 눕게 되시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부터 삽입했었던 도뇨관을 걸핏하면 건드리는 바람에 다시 교체해야 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도움이 필요한 상황을 간호사님께 말씀드리면 특별히 부탁드리지 않아도 알아서 일정을 조율해서 당일을 넘기지 않고 아버지의 불편을 해소해주셨다고 했다. 동생에게 요양서비스 기관에서 제공하는 의료적 보살핌과 일상 케어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아, 장기요양서비스의 기관 시스템이 잘 돼 있네. 제법 노력을 하는구나. 보험료를 냈으니, 이렇게 우리나라도 발전해 가는구나”라는 정도의 생각이 다였다. 하지만, 아버지를 우리 집으로 모셔오고 실제 내가 간병을 전담하게 되면서 이전과는 다른 느낌을 받게 됐다.

 

지난해 1월의 아버지는 장기요양등급이 1등급이 된 지 두 해가 지나 신체의 여러 부위가 굳어 뻣뻣해졌고, 의사소통은 거의 불가능하고 말씀은 한두 글자를 내뱉으시는 정도가 전부였다. 연하장애로 인해 더 이상 식사가 어려워진 아버지는 비위관 삽입 후 우리 집에 오셨다.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 대한 긴장감 덕분인지, 이따금 나를 알아보는 느낌에 “내가 누군지 아세요?”라고 물으면 동그랗게 뜬 큰 눈을 하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한껏 기대에 부풀어 여기가 어딘지 아냐는 물음에 “병원”이라고 하셨다가 둘째 딸 집이라고 말씀드리니 어눌한 발음으로 “수원인데?”라고도 하셨다. 아버지와 이런 대화가 오가는 날이 있다니, 이런 일은 정말 온몸에 전율을 일게 하는 일이었다. 어느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시던 아버지가 찰나일지라도 정신이 맑아지시는 그 순간을 내가 함께한다는 것, 아버지를 모셔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넘쳐흘렀던 순간이었다.

 

그와는 반대로 정말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렇게 간혹 아버지의 맑아지는 정신이 곤란하던 때도 있었다. 내가 대소변을 처리하고 정리해드리면 둘째 딸에게 험한 모습을 보인다는 생각에서였는지 눈물을 흘리시며 소리 내어 흐느껴 우셨다. 그런 안타까운 모습을 본 요양보호사님께서 본인이 머무는 시간 안에 최대한 배변 정리가 가능하도록 유도하며 아버지를 안심시키셨다. “어르신, 대변은 제가 있을 때 보시면 돼요. 제가 해드릴게요. 아버님 마음 아프셔서 그러시죠? 따님 힘들지 않게 제가 해드리면 되지요? 자, 아버님 약속”이라며 아버지께 지속적으로 말씀드리고 아버지의 굳은 새끼손가락을 따뜻하게 쓸어내려 자신의 손가락에 마주 걸어 약속하면서 매일 아버지를 다독이셨다. 그런 따뜻한 마음이 전해졌는지 아버지는 한동안 요양보호사님이 방문하시는 시간에만 대변을 보시기도 하는 놀라움을 보이셨다.

 

요양보호사님이 방문하시면 아버지를 위해 내가 쓴 글을 읽어 주십사 부탁을 드렸는데, 그 글을 읽어드리며 요양보호사님은 아버지 표정의 변화로 감정을 살피고 함께 울고 웃으며 아버지와 마음을 나누셨다. 요양보호사님께 아버지를 위탁하고 잠시나마 편안히 눈을 붙이고 쉬고 나서 요양보호사님을 뵈면 눈시울이 붉어진 날들이 종종 있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묻는 나의 질문에 아버지가 글 내용을 듣고 반응하셔서 그 모습에 감격해서 함께 눈물지었다는 답을 주셨다. 진심이 아니라면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요양업종에 종사하시는 분들은 기본적으로 선한 마음이 기반이 돼 있는 분들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를 대하듯 부드럽게 어르며 먹이고 닦이고 주무르는 것을 넘어 마음으로 소통하며 눈 마주치고 웃으며 공감대가 형성되는 케어를 받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는 현장이라고 생각되는 날들이었다. 아쉽게도 지난해 3월에 들어 코로나19가 급격하게 확산되며 아버지의 안전에 초점을 맞추는 것에 가족들의 의견이 모였다. 그로 인해(외부인 접촉에 대한 두려움) 더 이상 요양보호사님의 방문은 어려웠지만 두어 달간 보여주신 정성만으로도 우리 가족의 감사한 마음을 전달하기에는 어떤 말로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지내며 1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장기요양 1등급 환자의 보호자로서 직접 장기요양서비스를 경험하면서 요양보호사님도 감동이었지만 무엇보다 서비스를 이용하며 가장 핵심이 됐던 부분은 방문간호였다. 직접 간병을 하며 알게 된 현실적인 어려움 중 하나는 위중하신 분일수록 침상을 떠나 이동을 해서 병원을 내원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움직여야 할 만큼 여러 부분(낙상, 욕창, 감염 등)에서 위험하고 힘든 일이라는 점이었다.

아버지의 상황도 그러하다 보니 병원 방문에 대한 불안을 감소시켜주는 방문간호와 인터넷을 활용한 화상진료는 너무 혁신적인 일일 수밖에 없었다. 날이 하루하루 채워질수록 아버지는 비위관을 통한 영양 공급도 힘들어지면서 영양제로 버티는 날이 많아졌고, 화상진료로 진통제를 처방받는 의료지원을 받아 고통과 싸우면서 하루를 버텨내시는 아버지에게 간호사님은 정말 둘도 없는 단비였다. 아버지의 병세가 짙어질수록 방문 일수가 점점 많아지고 응급 호출로 야간 방문도 잦아지는데 언제나 따뜻한 미소로 아버지를 살펴주셨다.

 

작년 가을에 접어들면서 아버지의 기력은 점점 쇠퇴해져 갔고 영양제를 투여하는 혈관을 잡는 것 또한 점점 힘들어져 갔다. 가을이라 해도 아직은 쨍한 더위가 남아 있을 무렵이었다. 한 시간이 훌쩍 넘도록 매달려 혈관을 잡아도 힘없이 터져버리거나 도망가 버리는 통에 진땀을 빼며 긴장과 더위로 간호사님의 얼굴과 몸이 땀에 흠뻑 젖어 내리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도 힘든 내색 하나 없이 아버지 걱정만 하며 끝까지 애써 주시며 포기하지 않으시고 일을 마치셨다. 아버지의 방문간호 담당자이셨던 간호사님은 센스와 친절, 따뜻함을 두루 겸비한, 정말이지 천사 옷을 입지 않았다 뿐이지 천사 그 자체였다. 그분을 떠올리면 환자를 돌보는 직업군에 백의의 천사라는 말이 붙은 것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곧바로 수긍이 된다.

 

밤늦은 시간에 간호사님의 손길이 필요해진 다급한 때라도 생기게 되면 초조한 마음으로 응급 호출을 드리는데 그 마음을 십분 헤아려 지체 없이 서둘러 방문해주셨던 그 마음이 지금 떠올려도 눈물이 나도록 너무 감사하다. 다시 떠올려보아도 간호사님은 아버지를 처음 만난 그때부터 아버지의 마지막 날까지 한결같은 모습으로 우리의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셨다. 나는 삶의 끝자락에서 사경을 헤매는 아버지에게 자식으로서 사력을 다해 돌봐드릴 수 있도록 장기요양서비스(간호사님)로부터 든든한 지지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채 며칠도 남지 않았을 거라는 말을 듣고 실의에 빠져 집으로 모셨던 아버지가 11개월을 꽉 채워 내 곁에 머물러주셨다.

 

그 11개월의 시간 동안 아버지와 내가 ‘같은 공간에서 함께했기에 가능했던 것’들이 있었다. 그것은 언제 마주칠지 모를 귀하고 소중한 시간으로 아주 가끔 아버지의 정신이 맑아지셨던 순식간에 스쳐간 순간들이었다. 그런 찰나의 빛이 드는 시간이면 아버지는 당신이 떠나신 후에 남은 가족을 염려하시고, 내 딸아이의 안부를 묻고, 사위와 장난을 치고, 나를 알아보시며 웃어주셨다. 그 빛나는 추억을 내 남은 삶에 간직하고 갈 수 있음에 감사한다. 아쉽게도 아버지와 함께했던 336일이 얼마나 기적 같았는지 함께하지 못한 이들은 그 감동의 크기와 깊이를 알지 못할 것이다.

 

현시대에 인간으로 태어나 삶의 마지막에 그 존엄을 지키며 사랑하는 가족 옆에서 반짝이는 추억을 쌓고 마지막을 평안하게 채비할 수 있는 소망을 현실화하는데 있어 장기요양서비스의 지원이 각 가정에 큰 힘이 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굳게 믿으며, 사랑하는 아버지의 안녕과 명복을 빌며 이 글을 마친다.

 

<노인장기요양보험 웹진 2021년 10월호> 

<저작권자 © 요양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늘의 주요뉴스
체험기
가이드
인터뷰
칼럼
댓글쓰기

[2021 장기요양보험 수기공모 체험수기 우수상] 사랑하는 아버지와 함께 지낸 336일간의 기적 같았던 시간들

  • 관리자
  • 2021.10.28 10:44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