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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인물iN]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사회복지사가 걸어온 10년은?

  • seraday06***
  • 2023.10.30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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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복지인물iN’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복지에 감사하며 복지와 관련된 인물의 업적, 비하인드 등을 알아보는 코너입니다. 새롭고 흥미로운 소식으로 매주 찾아오겠습니다. 복지의 여정으로 함께 떠나볼까요?] 

 


김주흥 서울시부시장, 한노병원 사무장 레케보(왼쪽) 씨에게 감사장 수여 [사진=서울기록원] 

 

현재 상급종합병원에서는 모든 환자가 질병을 치료할 뿐만 아니라 심리·사회적 문제도 해결한 후 집으로 돌아간다. 의료사회복지사들이 병원에서 환자들의 의료 외적의 아픔을 진단하고 맞춤형 돌봄을 연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의료복지 시스템은 외국인 곧프레드 레케보(Gotfred Rekkebo, 1911~1993) 덕분이다. 그는 국내 최초의 의료사회복지사로서, 인적자원과 물적자원을 동원해 사회복지의 기반을 다졌다.

 

우리나라 의료사회복지는 레케보가 구상한 그대로 실현됐다. 그는 제대로 된 교육 인재가 세상을 도울 수 있다고 믿고, 이론 중심의 한국 사회복지교육에서 실무와 사례의 중요성을 몸소 보여주기로 했다. 손수 학생들을 대상으로 사회복지 실천에 대해 가르치고, 병원에 의료사회복지사로 투입했다. 교육비 등 재정 도움은 직접 캐나다의 한 협회를 만나 이뤄냈다. 그는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복지를 이끌어갈 한국노인복지회 조기동 회장을 발굴하기도 했다.


사회복지의 기반, 실용적 교육은 그의 손에서

한국전쟁은 국제사회의 긴급 구호와 지원을 불러들였다. 곧프레드 레케보도 노르웨이 의료팀의 일원으로 1951년 한국전쟁에 참전한 남성간호사였다. 노르웨이 야전병원에서 7개월간 의무요원으로 근무하고 돌아간 그는 4년 만에 다시 한국에 왔다. 1955년 한노협회(Norwegian Korean Association,NKA)의 대표로 레케보가 1967년까지 12년간 일하면서 한국 의료사회복지의 역사가 시작됐다.

그는 간호사였으나, 종교인으로서 본래 맞춤형 사회복지(케이스워크)를 지원하는 기독교 사회복지사의 교육과 훈련 시설에 관심이 많았다. 사회사업의 기반을 한국에 정착해 펼친 까닭은 우리나라에서 사회복지가 발전할 희망과 가능성을 발견해서다. 이미 중국에서 인재 양성에 대해 한 차례 실패를 경험한 레케보는 사회복지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한국은 사회복지를 교육하는 대학교들이 설립돼 있었다. 아쉬운 점은 실습보다는 이론으로 구성돼 실용적이지 못했다. 레케보는 한국이 사회복지의 필요성은 인지했으나, 교육의 방법이 잘못됐다고 느꼈다. 이를 증명하듯 사회복지 전공을 하고도 실업자로 살던 사람이 대다수였다. 그는 이론이 아닌 사례 위주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봤다.

19587월 그는 초보자 과정 강좌를 개설해 사회복지를 가르쳤다. 그리고 그 강좌를 이수한 2명은 한노병원에서 의료사회복지사로 일하게 됐다. 이 밖에도 그는 계속해서 사회복지사를 배출했고, 그들은 국립의료원, 서울시립병원에서 환자와 그 가족들을 도왔다. 레케보 또한 일주일에 하루 반나절을 국립의료원의 환자들을 위해 일했다.

당시 한국전쟁 전후, 전염병인 결핵으로 고생했던 한국의 입장에서 노르웨이인의 도움은 대단한 업적이었다. 병원에서 질병 외적인 것까지 돌봤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했다. 그는 가난한 결핵환자들과 그 가족들을 위해서 마포구에 급식소를 열어 매일 3천 명가량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고,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을 배려해 남녀 따로 두 채의 집을 세내어 보호소를 열었다.

 

사회복지사를 고용하고 훈련시킨 든든한 뒷배... USCC의 지원받

사실 이 모든 의료사회복지의 발전은 레카보의 의지만으로 될 일은 아니다. 인적자원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물적자원이 사전에 준비됐어야 실천에 옮길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속한 한노협회는 결핵사업 지원만으로도 재원이 모자랐다.

레카보는 물적자원을 제공할 또 다른 후원자가 반드시 필요했다. 도움이 가장 절실하던 시기 1956년 레카보는 사회복지사를 고용하고 훈련할 비용을 제공할 사람을 찾았다. 우연히 조우한 캐나다유니테리언봉사회(Unitarion Service Committee of Canada, USCC) 사무총장 롯타 히지마노바(Lotta Hitschmanova) 박사가 경제적 지원을 하기로 한 것이다.

캐나다유니테리언봉사회는 1952년 부산에서 처음 구호를 시작한 외원기관으로 한국 최초로 학교사회복지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했었다. 이와 더불어 새로운 지원 분야를 찾고 있었는데, 히치마노바 박사는 레카보가 제시한 의료사회복지에서 희망을 발견했다. 훗날 레카보의 기록에는 이 둘의 만남을 두고 이렇게 서술했다. “마치 필요(need)와 도움(help)이 완전하게 서로를 위해 맞춤이 된 것과 같았다.”

둘의 만남 이후 노한협회는 한노병원에 약국조제실을 건립하도록 1957 12천 달러를 받았다. 1958년 레카보가 시행한 사회복지사 고용과 초급과 과정 교육도 캐나다유니테리언봉사회의 5천 달러 지원이 있어서 가능했다. 그 이후로도 몇 년간 기금 지원은 끊이질 않았다.

 

이렇듯 레케보는 국내 1호 의료사회복지사로서, 10여 년간 한국에서 인적·물적자원을 확보해 후배 의료사회복지사를 배출하는 데 힘썼다. 누구보다 물심양면 사회복지 발전에 지원을 더한 그다. 늘날 사회복지사로서의 전문적 지위와 존경은 이런 그의 업적 위에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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