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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인물iN] 개인의 선의에서 제도의 정비로

  • seraday06***
  • 2023.11.06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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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주: ‘복지인물iN’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복지에 감사하며 복지와 관련된 인물의 업적, 비하인드 등을 알아보는 코너입니다. 새롭고 흥미로운 소식으로 매주 찾아오겠습니다. 복지의 여정으로 함께 떠나볼까요?] 

 

故 김재환 원장 [사진=성우보육원]

 

먹고 사는 문제는 삶과 직결된다. 전시에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대전의 한 보육원에서는 하루 세끼 고아들에게 먹거리를 나눠줬다. 한국전쟁으로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기에, 시설 밖 아동들이   오히려 보육원 아동을 부러워할 정도였다. 성우보육원 설립자 김재환 원장(1911~1987)이 남몰래 고군분투한 덕분에 고아들은 굶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아동복지 및 사회복지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복지 선구자다.


김 원장은 대한민국의 미래는 아이들이 책임진다고 생각했다. 아동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살 곳과 배울 곳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배경도 이런 이유에서 나왔다. 그는 개인 중심의 복지 실천은 물론 제도 개혁에도 늘 앞장섰다. 사회복지시설의 설립 취지에 위배되는 정책에는 목소리를 내고, 돌봄 환경의 정비가 필요할 때는 도맡아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아동 한 명을 돌보다... 성우보육원에서 35

모든 일에는 동기가 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가 가난한 고아에게 관심을 가진 일도 그랬다. 일제강점기 때 청년이었던 김 원장은 낮엔 직장인이고, 밤엔 선생님이었다. 야학봉사활동을 했을 뿐이지만,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려 했다는 혐의로 쫓기는 신세가 됐다. 그가 배고픔에 주목한 것은 가난을 공감한 이 사건에서 비롯된다.

 

1952년 대전역 앞은 전쟁 잔해로 가득했다. 오랜 노숙 생활로 고통받는 고아도 많았다. 이 광경을 보게 된 김 원장은 대전에 낡은 가옥을 사서, 45명의 고아를 거둬들이기로 결심한다. 전부 사비였다. 고아양육사업을 시작한 1년 후 그는 본격적으로 보육원을 설립한다. 1953년 충남도청에서는 그의 헌신을 듣고 78명의 고아를 트럭으로 데려와 돌봐 달라 부탁했다. 처음 대전역에서 데려온 45명의 고아들과 나중에 온 78, 이들은 123명의 대가족이 되어 성우보육원에서 자랐다.


당시를 두고 김 원장의 자녀는 전쟁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보육원은 전쟁보다 더 극심한 끼니전쟁을 겪었다. 한 사람이 세 끼를 먹어야 하는데, 입소자 수가 수백 명에 달하니 자신들의 몫을 떼고서도 매일 369인분의 식량을 구해야 했다. 심지어 아동들이 가장 많을 때는 200명이 같이 살았다. 또 식사준비부터 배식까지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주식은 강냉이죽, 옥수수가루빵, 가루우유 등이었다. 배급량이 부족할 때는 물로 양을 불려 그들은 함께 버티고 버텼다.

 

성우보육원 설립자 김 원장은 자립 지원도 목표로 했다. 아동복지시설에서 보호받는 아동들이 퇴소 후 겪는 어려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그는 보육원 설립 이전에 쌀 생산 증대를 고민하는 회사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살려 1964년 농업학교를 개교했고, 아동들의 자립의 기반이 될 영농기술을 전수했다. 이 학교는 학비 낼 형편이 되지 않아도 다닐 수 있었다. 장차 사회일꾼이 될 그들에게 배움은 필수라는, 그의 신념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김재환 원장의 헌신적인 돌봄으로 아동 개개인의 삶은 달라졌다.

 

의견을 내고 법을 만들다

그의 노력으로 소기의 성과가 있었지만, 수많은 아동의 삶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대다수가 배고팠고 배움의 기회 박탈에 놓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였다. 정부와 적극적인 대화로 제도를 바꾸는 것. 아동복지의 틀을 만드는 데 있어서 그의 적극적인 호소는 세상을 바꾸는 데 일조했다. 김 원장은 국가가 가난해서 아이들의 중고등학교의 학비를 감면해 주지 못했다며 정부를 비판했다. 이 주장은 1985년 중학교 무상의무교육이 일부지역에 선도입되면서 빛을 봤다.

 

아동들이 피해를 볼 수 있는 정책에는 반대 의견도 표명했다. 1970년 중반 정부에서 경제성장과 사회복지시설의 경영합리화를 위한 시설 통폐합을 추진했다. 아동복지시설장들과 김 원장은 이를 반대했다. 시설이 작다고 해서 큰 시설에 통합한다는 것은 설립 취지와 아동 보육 목적에 된다는 게 골자다. 아이들은 큰 시설보다는 작은 시설에서, 가정과 비슷한 환경에서 돌봄 받아야 한다는 그의 큰 뜻이었다.

 

이 밖에도 아동 생계비 문제나 직원의 작은 보수에 관해서 정부에 투쟁했다. 그는 보건사회부(現 보건복지부) 아동과를 누구보다 먼저 찾는 이였다. 전국의 아동들이 바르고 건강하게 성장하려면, 정부의 보조금을 현실화하는 방향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믿었던 까닭이다.

 

잘 돕기 위한 인력을 양성하는 제도를 만드는 데도 애썼다. 그는 1981년 4월부터 한국사회복지협의회 부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제1·2회 전국 사회복지대회(1981, 1983)를 기획해 개최했다. 사회복지사 자격제도를 1급, 2급, 3급 자격으로 제정하는 준비 작업도 추진했다. 사회복지사 자격제도는 1984년 김 원장이 재직하는 동안 사회복지사업법 개정과 동시에 발효됐다. 사회복지협의회에서 논의된 사회복지사 자격제도는 국가의 경제발전과 함께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돌봄 인력을 수급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김재환 원장의 생애와 삶은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안정을 추구하는 데만 쓰였다. 그리고 그 업적은 아동 한 사람의 삶을 바꾸는 것을 넘어 전체 사회에 영향을 주고 있다. 사회복지실천 현장가로서의 그의 노고를 많은 아동들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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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인물iN] 개인의 선의에서 제도의 정비로

  • seraday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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