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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장기요양보험 수기공모 체험수기 우수상] “어머니, 참 잘하셨어요~”

  • 2024.01.09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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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참 잘하셨어요~”  

 

 

2022 장기요양보험 수기공모 체험수기 우수상 

 

글: 유순동


“누나가 나한테 한 번이라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했냐고~” 

“나도 할 만큼 했어 왜~” 남동생이 울부짖으며 대들었다.
그의 곁에서 올케는 남동생을 말렸지만 나도 질세라 “나는 할 만큼 안 했어? 아들 며느리가 부모 모시는 것이 당연하지 어디서 공치사를 해~”라며 더 큰 목소리로 응수했다. 부모님을 모시고 살던 남동생은 코로나19로 가게 문을 닫게 되면서 결국 분가하게 됐고, 한 달에 한두 번씩은 모이던 가족들마저 점점 서먹해져 소식이 뜸해지고 있었다.

가족들도 모르는 사이에 방치된 어머니의 치매 증세

3남 1녀 중 유일한 딸이었던 나는 가끔 반찬과 청소를 해드리기 위해 친정을 찾았고 코로나19로 인해 손녀딸이 다니던 유치원이 문을 닫다 열다 반복하면서 그때마다 휴가를 낼 수 없다며 외손녀를 돌봐 달라는 딸의 간곡한 부탁을 뿌리칠 수 없어 얼떨결에 양육을 도맡게 됐다.

먹고사는 문제로 어쩔 수 없이 분가를 결정하게 된 남동생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불똥은 온순하고 만만한 올케에게 튀었고 시누이 본성을 드러낸 나는 서운한 마음에 부모님을 버린 자식 취급을 하며 시비를 걸었고 동생 내외와 만나기만 하면 다투는 것이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한집안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남동생이 고맙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들이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늙고 병들어 점점 건강이 쇠약해져 가는 부모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동생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했고, 시골 외딴집에 덩그러니 남게 된 늙은 부모를 생각하니 걱정이 앞섰다.

치매 증상으로 기억을 하지 못하는 여성 어르신의 모습

코로나19로 전국이 시끌벅적했고 변이 바이러스까지 출현하면서 방송에서는 연일 코로나19에 대한 보도가 이어졌다. 면역력이 떨어진 부모님께 전염이 되면 안 되고 어린 손주들을 돌본다는 핑계로 나는 친정에 발길을 뚝 끊고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이상하다며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만 지낸다는 것이었다. 또 분가하고 없는 손주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 됐다며 올 시간이 되면 대문 쪽으로 길게 목을 빼고 바라보다가 안절부절못하고 방을 들락날락하면서 아이들이 오늘따라 왜 이리 늦는지 모르겠다며 엉뚱한 소리를 하곤 한다며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고 했다. 우스갯소리도 곧잘 하던 어머니는 종일 말 몇 마디 하지 않고 밥 먹을 때도 잊어 낮에도 한나절씩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때를 놓친 식사를 할 때가 많다고 했다.

남동생은 아버지에게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고 화를 냈고 아들 내외와 손주들과 함께 살다가 분가했으니 적적함에 저러다 말겠지 생각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자식들에게 말해봐야 걱정하고 신경 쓸 것을 생각해 말도 못 하고 지내다가 코로나19와 맞물려 방문이 뜸해진 사이 어머니의 치매 증상은 방치되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의 이상 행동이 치매일 거라고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오랜만에 친정집을 찾았다. 입었던 옷가지와 세탁한 옷가지들이 구분 없이 뒤엉켜 있었고, 약봉지들이 방바닥을 뒹굴고 있어 집안 곳곳이 너저분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집안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쓰러져 자고 일어나면 다음 날부터 손녀딸 육아를 도맡아야 했기 때문에 나이 60이 된 나의 건강도 적신호가 켜지고 있었다.

친정을 다녀온 이후에는 며칠 동안 몸살로 앓아누웠고 남편은 내 건강을 걱정했다. 설상가상으로 친정을 다녀오다가 교통사고까지 나면서 남편은 친정을 가지 말라며 소리를 쳤다. 그러다 보니 도둑고양이가 돼 친정을 남편 몰래 가야 했고 피곤하다 내색조차 할 수 없는 처지가 되면서 점점 삶이 고단해졌다. 남들이 생각하는 언제나 한걸음에 달려가고 싶은 그리운 나의 고향 집의 부모는 짐처럼 느껴졌고 친정이 진절머리가 났다.

양보호사를 문전 박대하며 소리를 지르던 어머니의 모습

따뜻하고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던 즐거운 나의 집은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 했던가... 까르르 웃는 손주들의 재롱에 푹 빠져 부모는 안중에 없던 어느 날, 어린 손주들을 데리고 놀이터에 나와 놀게 됐다.

저만치 나와 비슷한 나이 정도의 60대로 보이는 여자는 할머니를 부축해 의자에 앉히고 발 지압을 하는 알 모양의 돌들이 촘촘히 박힌 코스를 손을 잡고 천천히 걷기 운동을 지도하고 있었다. 얼핏 보아도 참 살뜰하게 챙기는 모습에 마음까지 따뜻했다. 나는 호기심 반 친해지고 싶은 마음 반으로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공원 벤치에 앉아 두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여성 어르신과 요양보호사의 모습

 

“딸이신가 봐요?”
“아뇨 요양보호사예요.”
순간 시골집 툇마루 끝에 앉아 멍하니 먼 산만 바라보고 앉아 있을 80세 중반의 나이로 하루가 다르게 건강이 악화되는 부모님 생각이 났다. 너무 사이가 좋아 보여서 딸과 친정어머니인 줄 알았다고 했더니 2년째 돌봐드린다고 했다.

 

요양보호사에게 도움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고 그길로 손녀딸을 업고 공단을 찾아갔다. 부모님 건강에 대해 상담을 하고 도움을 받고 싶다고 했더니 등급 신청서 작성을 도와주었다. 며칠이 지나 인정조사를 하고 갔고 드디어 4등급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등급만 받으면 다 되는 것이 아니었다. 요양보호사와 센터장이 다녀간 뒤, 어머니는 경계의 눈빛으로 곁을 내어 주지 않았고 첫날부터 요양보호사를 문전 박대하기 시작했다. 집 앞 마당까지만 와도 가라고 소리를 질렀고 마루에 있는 손에 잡히는 빗자루며 쓰레받기 등을 집어 던지기까지 했다.

요양보호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당에 던진 물건을 주워 들고 어머니가 조금 누그러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우편물을 챙겨 들고, 혹은 빨래를 널어 드리겠다며 은근슬쩍 집 안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물건들이 날아왔고 요양보호사는 신발로 어깨를 맞았다며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러기를 여러 날이 지났고 잊을만하면 한 번씩 신발이 날아오고 빗자루가 날아와도 요양보호사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집을 찾아왔고 그때마다 기질을 발휘하셨다. 가족들은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저러면 시설로 보내야 한다고 했고, 멀미가 심한 어머니에게 차량 이용을 하는 주간보호는 적합하지 않다며 의견이 분분했지만 딱히 해결책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도 평생 살던 고향 집을 떠나서 살 수 없을 거라며 눈시울을 붉히셨고 아버지가 직접 돌보겠다며 시설 보내는 것을 반대하셨다.

요양보호사의 노력으로 달라진 어머니의 태도

요양보호사는 키가 작고 손등이 두툼한 부지런한 분이었다. 어머니의 이상행동을 치매로 인한 질병이라며 오히려 가족들에게 치매에 대해 설명해주셨고 되레 우리 가족을 이해시켰다. “어머니 저는 어머님 잘 돌봐 드리라고 나라에서 보낸 요양보호사니 가라고 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며 지혜롭게 대처하셨다. 요양보호사는 점심밥을 손수 지어 국물이 없으면 밥이 안 넘어간다는 부모님을 위해 항상 국을 끓여 대접해드렸고 어머니가 스스로 하실 수 있는 것은 하도록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기다려주었다.

유독 복용하는 약이 많다 보니 약을 먹고도 기억하지 못하고 먹다 안먹다 하던 약도 정확한 용법에 따라 챙겨주었으며 시골집이라서 문턱이 유난히 높은 까닭에 자주 넘어지곤 하던 문턱은 넘을 때마다 손을 잡아주며 넘어지지 않도록 부축했다. 요양보호사님은 딸기 농사를 조금 짓는다며 딸기주스와 잼도 만들어 식빵을 사다 잼을 발라 드렸고 어머니는 “내가 오래 살다 보니 생전 미국 빵을 다 먹어 보고 호강한다~”며 딸기잼을 바른 식빵을 맛있게 드셨다고 했다.

여성 어르신과 요양보호사가 함께 요리를 하고 있는 모습

어느 날은 “어머니 국수 좋아하세요?”라고 요양보호사가 묻자 어머니가 “애호박을 채 썰어 들기름에 볶아 고명으로 얹으면 참 맛나다”고 하셔서 함께 요리해보자고 했더니 너무 좋아하시며 국수를 직접 말아주셨다고 하셨다. 마을 잔치가 있을 때마다 국수 담당이었다며 본인의 음식솜씨를 자랑하시며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말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친정집에 오면 치매 걸린 엄마와 마땅히 나눌 대화가 없었다. 치매 노인이라고 생각하니 의미 없는 소통이라고 생각했다. 치매 노인은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무조건 일방적인 도움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본인의 의지나 욕구는 중요한지 묻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요양보호사는 어머니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부쩍 잘 웃으셨다. 무슨 비결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어머니와 요양보호사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어머니 참 잘하셨어요~”
“어머니 덕분에 잘 먹었어요~”
“어머니 수고 많으셨어요~”
요양보호사는 어머니에게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말들을 자주 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가족들에게도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넨 적이 없던 나는 누나와 자식으로서 한없이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에 울컥했다.

 

얼마 전에 남동생과 나는 어머니가 끓여준 잔치국수를 먹었다. 어머니는 후루룩거리며 맛있게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국수를 먹고 난 후, 커피를 무심히 저은 뒤 동생 내외에게 건네며 말했다.

 

“부모님 모시느라 수고 많았다. 고맙다~”
남동생은 말없이 커피가 식을 때까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채 어린아이처럼 흐느껴 울었고 그 곁에서 착한 올케도 따라 울었다. 가족이라도 당연한 것은 결코 없으며 “수고했다~ 고맙다~” 표현하며 살아야 하고 그로 인해 서로의 마음이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요양보호사를 통해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변이 바이러스 확산으로 인해 자식들의 방문을 자제하고 부득이하게 방문할 경우에는 신속항원키트 검사 후 음성이 나오고 코로나19 유사 증상이 없을 때만 방문하라는 센터의 당부가 있었다고 요양보호사에게 연락이 왔다. 욱하는 성격으로 자주 싸웠던 남동생과 나는 요양보호사의 말을 잘 듣고 센터의 당부에도 적극 협조한다. 우리 가족에게 요양보호사는 큰언니처럼 큰누나처럼 부모님을 위하는 또 한 사람의 자식이 됐고 우리 가족은 이전보다 더 화목하고 의좋은 사이가 됐다.

곁을 내어주지 않고 오지 말라고 물건을 집어 던지는 어머니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 이제는 식사도 잘하시고 약도 잘 먹은 덕에 이상행동도 많이 좋아졌고 이전보다 건강하고 잘 웃으신다. 눈물 많은 아버지도 덩달아 웃음이 많아지셨다. 나도 이제 더 이상 도둑고양이가 되지 않아도 된다.

부모님을 모시고 가족여행을 떠난 글쓴이의 모습

어수선한 코로나19 시국이지만 노인장기요양보험이 있어 두렵지 않다.
봄이 오고 있다.
노인장기요양보험이 있는 한 자식들에게는 언제나 봄이다.
곧 꽃들이 만발하고 코로나19도 끝나서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어 던지고 향긋한 꽃향기를 맡으며 부모님을 모시고 가족여행을 할 날이 빨리 오기를 소망해본다.

 

<노인장기요양보험 웹진 2022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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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장기요양보험 수기공모 체험수기 우수상] “어머니, 참 잘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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