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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장기요양보험 수기공모 체험수기 우수상] 그런 소리 마슈

  • 2024.01.09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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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소리 마슈 

  

2023 장기요양보험 수기공모 체험수기 우수상 

 

글:고은하

 

소녀같이 방긋방긋 웃으시던 어르신께 밤만 되면 찾아오는 일몰 증후군.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끄떡 없이 문을 열어 달라는 어르신의 고함소리는 밤마다 요양원에 메아리가 되어 울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들이닥친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는 코로나19.
험난한 상황 속에서 어르신과 요양원은 무사히 이겨낼 수 있을까?






어르신, 우리 함께 재미있게 살아요

 

앉아있는 어르신

먼 길로 돌아가야 할까. 시속을 늦추어야 할까. 차창 밖 하늘은 무심히도 푸르고 어머니와의 추억은 요양원으로 가는 길목에 그렁그렁한 눈물방울을 떨어트릴까 이를 악물게 하는데...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입소시켜야만 하는 보호자님들의 안타까움을 잘 알기에 ‘앞으로 우리와 함께 어머니를 잘 모셔요’ 라며 보호자님들의 마음이 되어 어르신을 맞이합니다. “어르신, 이제 우리 함께 재미있게 살아요”

소녀같이 웃으시던 E.어르신과도 그렇게 첫인사를 나누며 방긋방긋 만났습니다. 워커를 끌고 아들, 딸들과 오셨던 어르신은 연신 밝은 얼굴로 자식들을 바라보시며 나 잘 살 거라고, 걱정 말고 니들이나 잘 살라고, 당당하게 자녀분들께 손까지 흔드시고 어르신 침실로 가셨지요. 점심도 맛있게 드시고 주변 어르신들과도 오래전부터 아셨던 것처럼 말씀도 잘 나누시던 어르신은 오후 4시쯤 되었을까요.

“이제 집에 가야지!”
갑자기 벌떡 일어서시며 워커를 밀고 1층 로비 쪽으로 향하시는데, 예기치 못한 어르신 행동에 눈이 휘둥그레진 선생님들이 “어르신, 여기서 우리 같이 살아요” 라는 말에도 “뭔 소리여? 차 시간 끊기는디”, “시어머니 밥 해드려야 혀” 라며 문 열어달라고 소리치며 고함을 지르셨습니다. 오랫동안 데이케어를 다니시던 어르신은 그맘때 시간이 되자 차 타고 집에 가셔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급기야는 어르신 짐을 큰 대야에 피난민처럼 담고 이불로 꽁꽁 싸시더니, 굽어진 허리로 그것을 끌고 출입문 앞까지 가셨지요.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어르신의 “일몰 증후군” 은 다른 요양원에 계실 때도 유명했던 것으로 우리 요양원이 벌써 4번째셨던 것입니다.

어르고 달래도 끄떡도 없이 문 열어 달라는 고함은 전 층에 메아리가 되어 울리고, 소녀같이 웃으시던 얼굴은 입에 담기도 민망한 단어들이 튀어나오며 일그러지셨습니다. 식사는 커녕 물도 안 드시고 문 열어 달라고 연신 화를 내시는데 보호자님들과 영상 통화로 달래드려도 잠시뿐, 저러다 쓰러지실까 걱정스런 선생님들이 맛있는 음식을 골고루 갖다 드려도 거들떠보지도 않으시고 퇴짜를 놓으시며 어르신은 막무가내셨습니다.

복숭아로 맞이한 새벽의 여명

어르신 식사 도와드리는 도우미

어르신들의 취침 시간. 아직도 스테이션 앞 소파에 앉아 투쟁 중이시던 어르신께 원장님은 예쁜 쟁반에 복숭아를 담아 오셨습니다. 한 입만 물어도 모든 병이 싹 나을 것 같은 한국 전래동화 속 전설의 복숭아처럼 보기만 해도 크고 탐스럽고 군침 도는 복숭아는 “나 한 입 드셔보세요” 라고 속삭이듯 어르신 앞에 놓여지고... “E.어르신, 이 복숭아 좀 드셔보세요. 정말 달고 맛있어요”, “안 드시면 후회할걸요.” 라는 원장님의 끊임없는 러브 콜에도 눈길 한번 안 주시는 E.어르신은 복숭아 쟁반을 더 깊숙이 어르신 쪽으로 밀며 포크로 찍어 “드셔보셔요” 라고 애교를 떨어도 단호하십니다.

“안 먹어...안 먹어...안 먹어”
원장님은 마침, 옆에서 안 주무시고 먹고 싶은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시던 다른 어르신께 “아, 그럼 어쩌지요. 어르신이라도 드셔보시겠어요?” 라며 복숭아 한 조각을 건네시는데 그 어르신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맙다며 너무 맛있게 드십니다.

‘저건 내건데’ 싶은 E.어르신의 눈동자가 복숭아를 향하는 순간, ‘이때구나’ 싶어 복숭아를 찍은 포크를 손에 쥐어드리며 “어르신, 이거 안 드시면 다 버려야 하는데... 아까워서 어쩌죠... 그냥 저 어르신 다 드릴까요?” 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버리긴 왜 버려. 음식 버리면 못써” 라며 날벼락 같은 불호령과 함께 질색팔색하십니다. 순간, 그 모습이 너무 귀여우셔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그니깐요. 어르신이 드시면 버리지 않아도 되잖아요” 하면서 입 쪽으로 슬슬 복숭아를 밀어 넣으니 어르신이 마지못해 드신다는 표정으로 한 입 베어 물으시고는 달고 단 복숭아의 향기에 매료된 듯 금세 입가에 미소가 퍼집니다. 한 조각 더, 한 조각 더. 버리면 몹쓸 짓이라며 계속 복숭아를 드시는 E.어르신. 급기야 E.어르신의 입에서 터져 나온 감탄사! “맛있네...”

성공! 복숭아가 어르신 입으로 들어갈 때마다 어르신은 천진난만한 소녀처럼 다시 해맑아지셨습니다. 물 한 모금 안 드시고 서서 소리만 지르셨으니 오죽 목이 타고 배가 고프셨을까요. “E.어르신, 우리 여기서 같이 살아요” 복숭아 하나에 마음이 누그러진 어르신께서는 “알았어. 알았어” 하시며 원장님과 손가락 약속을 하고 인증샷을 찍으니, E. 어르신의 첫날은 그렇게 새벽의 여명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둘째 날. 나른한 오후 햇살이 하늘에 잠길 무렵, 다시 시작한 어르신의 ‘일몰 증후군’. 남편은 죽었어도 시어머니는 여전히 살아계셔서 저녁밥 지어드려야 한다는 마음의 짐이, 차가 끊길까 초조한 어르신의 한숨소리로 1층 로비 자동문 앞에서 애달프게 울려 퍼지고, 한참을 씨름하시다 지친 몸이 쉬어가던 사무실은 어느덧 마실 터가 되어 온갖 과일의 향기로 어르신을 유혹하고, 과일을 드시며 해맑게 웃으시는 어르신은 다시 천사로 돌아오십니다. 그것으로도 부족한 날에는 어르신이 좋아하시는 카드놀이와 고스톱으로 해 떨어질 때까지 판을 벌여 어르신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니, 언제부턴가 사무실 한쪽 테이블은 직원들이 번갈아 가며 어르신과 고스톱을 치느라고 시끌벅적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렇게 무더위의 여름은 가을을 지나 겨울로 접어들고, 해가 바뀌어도 단 하루도 빠지지 않는 일일 프로그램처럼 어르신의 ‘일몰증후군’은 변함없는 모습으로 코로나19 팬데믹의 한복판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코로나19

어르신케어해드리는 도우미

일생에 한 번 치른다는 ‘홍역’도, 괴질이라 부를 정도로 무섭던 ‘콜레라’도 다 이겨내며 가난한 시절, 희생과 사랑으로 가족들을 위해 살아오신 어르신들. 새롭게 맞닥뜨린 ‘코로나19’는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섭게 사람들의 삶 속으로 파고들었고, 살갑게 자식 손 한 번 잡을 수 없는 힘든 숙제를 안겨주며 보고픔의 속앓이를 오랜 시간 달빛에 적시게 했습니다. 1차 예방을 하면 나아질까. 동절기 접종을 하면 좋아질까. 코로나19는 엔데믹이 될 수 있을까.

PCR 검사, 신속항원검사, 외래진료 후 어르신 격리. 매일 연무 소독과 일반소독, 환기. 가림막 및 거리두기 식사, 열 체크. KF94 마스크와 안면 가리개 착용 등 할 수 있는 건 다 찾아 예방하고, 지키고, 버티고, 막아왔던 코로나바이러스가 요양원의 틈새를 찾아 들어왔을 때 공든 탑 무너지는 것도 순간이고, 건강한 사람이 무너지는 것도 순간임을 몸으로 단련해 가는 시간들. 확진된 직원과 어르신들이 연이어 나오면서 시설 격리에서 코호트 격리까지. 확진 직원은 확진 어르신들을 돌보고 미확진 직원은 확진 안 된 어르신들을 돌보며 사투를 벌였습니다.

그러던 중, 방호복을 입고 계속되는 검사를 진행하다 제 손이 후들거리기 시작했는데 ‘아차’ 하는 순간 E.어르신의 코를 깊숙이 찔러 어렵게 검사한 면봉을 채취도 하지 않은 채 폐기물 상자에 버리고 말았습니다. 순간, 로비 앞에서 문 열어달라는 어르신의 고함소리가 귓전에 울리는 듯하고 ‘아, 하필...’ 하는 마음이 스쳤습니다. ‘이를 어쩌지... 간신히 한 건데... 두 번 하면 난리치실텐데’ 치매 어르신들은 아무리 설명해도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몸부림을 치셔서 코로나 검사가 일반인보다 몇 배는 힘든 경우가 많은 데다가 E.어르신이 소리치실 땐 그야말로 호랑이셔서 스치는 생각은 어둡고... 검사를 안 할 수는 없고... 저는 어르신 휠체어 앞에 쭈그린 채 어르신께 진심으로 용서를 청했습니다.

“어르신 정말 죄송해요. 제가 검체 채취도 안하고 쓰레기통에 버렸어요. 정말 죄송해요. 다시 해야 하는데.... 다시 아프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E.어르신은 그윽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시더니, 예상과는 달리 잘 움직이지 못하시는 손을 천천히 움직이시며 안면 가리개에 가려진 제 얼굴을 쓰다듬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 소리 마슈. 내가 얼마나 고마운디... 내가 얼마나 고마운디 그런 소릴 하셔” 순간, 울컥... 울컥... 울컥...

계속되는 어르신들 확진과 돌봄으로 지쳐가던 제 마음에 방울방울. 부끄럽고 미안함의 눈물이 떨어집니다. 고맙고 감격스런 움직임. 천천히 움직이시며 제 마음을 쓰다듬는 어르신의 손. 가난한 ‘치매 어르신’의 손이 하루하루 지쳐가던 저를 위로하십니다. 후들거리는 제 팔을 잡아 안으시며 힘내라고 다독이십니다. 이 또한 지나갈 거라고. 그렇게 한 달. 사투를 벌인 자리마다 피어난 ‘인내’와 ‘사랑’, ‘희생’과 ‘협동’의 꽃들이 꿋꿋하게 묵은 시간들과 싸워 요양원 뜨락에 향기로 피어오르고, 드높은 가을 하늘이 청명한 날, 드디어 4명의 어르신들의 백수 잔치를 성대하게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어머니

어르신 식사 도와드리는 도우미

봄나들이 가시는 아줌마들 틈에서 소매가 다 떨어진 쉐타에 몸빼바지 입고 사과를 팔러 가시던 어머니의 고운 봄날이, 꽃잎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겨울의 100세에 이르기까지. 자식들을 위해 헌신해 오신 사랑의 세월을 이야기하시는 보호자님의 편지글은 모여있던 우리들의 가슴속에 눈물 꽃이 되고, ‘괴않다 괴않다’ 하시는 듯,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보시는 치매 어르신의 모습은 가슴 시리도록 빛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어머니’셨습니다.

나조차 나를 잊어도
지울 수 없는 이름 하나 있으니
늙은 주름으로
굳어진 다리 위로
고목나무 껍질 같은 손결 위로
그리운 그 이름 잊을세라
새기고 새기고 또 새기는 자식의 이름을
눈빛으로나마 부르시는 어머니.

어쩌다 자식을 알아보는 순간에 어르신들의 그 환희에 차 빛나는 눈동자를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자신은 잊어도 아들, 딸을 잊지 않으시려는 무한 반복의 몸부림이 추억의 궤도 속에 애잔한 석양으로 물들어 갈지언정. 지워져 가는 기억의 저편에서 마지막까지 붙드시는 자식의 이름은 어르신들의 마지막 사랑의 찬가입니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그 사랑의 찬가를 들으며 함께 모여 사는 곳. 사랑의 향기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 행복이 되는 요양원, 향기가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요양원입니다.

<노인장기요양보험 웹진 202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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