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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인물iN] ‘복지국가의 아버지’ 베버리지 –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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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11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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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발간된 ‘베버리지 보고서’를 둘러싼 오해

[편집자주: ‘복지인물iN’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복지에 감사하며 복지와 관련된 인물의 업적, 비하인드 등을 알아보는 코너입니다. 새롭고 흥미로운 소식으로 매주 찾아오겠습니다. 복지의 여정으로 함께 떠나볼까요?]

1910년경 30대의 베버리지 모습 [사진=사회평론아카데미]
1910년경 30대의 베버리지 모습 [사진=사회평론아카데미]

 

윌리엄 헨리 베버리지(Wiliam Henry Beveridge, 1879~1963)가 1942년 발간한 ‘베버리지 보고서’는 한국의 제헌헌법을 만든 유진오(초대 법제처장)의 책상 위에도 있었을 만큼 우리나라 사회보장제도의 토대라 불린다. 반면 그 역사적 중요도에 비해 한국에서는 반세기가 지나서야 원본이 번역될 정도로 잘못 알려지거나 덜 알려진 이야기가 많다. 이번 복지인물iN은 그의 업적인 베버리지 보고서에 대한 오해를 풀어 진실을 알리고자 준비했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베버리지 혼자 만들었다? (O / X)

사회보험의 틀을 제시한 ‘사회보험과 관련 서비스(Social Insurance and Allied Service)’가 일명 베버리지 보고서로 널리 알려지며, 베버리지는 ‘복지국가의 아버지’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근대 사회보장제도의 기틀 마련은 그 혼자만이 일궈낸 결과가 아니었다. 베버리지가 주도적으로 작성했으나, 제도 개선의 필요성을 느낀 영국 범부처 관계자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으로 지친 각국 정부는 “전쟁이 끝난 세상은 살기 좋고 편안해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에 도달하면서 사회보장 개혁 조치가 이뤄졌다. 1941년 6월 영국의 연립정부도 ‘기존의 국가보험 실태조사 및 권고안’ 작성을 목표로 하는 위원회를 출범했다. 그 위원회의 장이 베버리지였다. 이처럼 보고서는 정부 부처의 합작품으로 기획됐다. 다만 원래 흩어진 사회보장제도 업무를 조정하는 일에 불과했으나, 베버리지는 전면 개혁으로 방향을 변경했다.

영국의 만평가 찰리 레슬리 일링워스가 베버리지 보고서를 정치적 다이너마이트로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진=사회평론아카데미]
영국의 만평가 찰리 레슬리 일링워스가 베버리지 보고서를 정치적 다이너마이트로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진=사회평론아카데미]

정부는 영국의 선별적 복지 기조를 버리고 ‘보편적 복지’로 전환해야 하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가 정책적 쟁점을 안고 있다고 판단해 그에게 내용 수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결국 정부는 논란을 우려해 위원회에 참여한 공무원을 부처 대표에서 자문관으로 위치를 격하했다. 그러면서 발간주체도 위원회에서 베버리지 단독 저술로 바꿨다. 결국 보고서의 내용은 함께 준비했어도 내용에 대한 확신은 베버리지가 가장 굳건했기에 복지국가의 아버지라는 ‘오늘날의 영광’은 그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출간 약 1시간 만에 6만 부가 팔렸다? (O / X)

정부가 흔적을 지워가며 우려했던 것과 달리 베버리지 보고서를 사기 위해 영국 국민들은 추운 겨울 날씨에도 간행물 판매처에 1마일(약 1.6km) 넘게 줄을 섰을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실제로 보고서는 출간 1시간 만에 무려 6만 부가 팔리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이런 인기는 식을 줄 모르며 정부 보고서가 비문학부문 베스트셀러가 되는 이례적인 일이 발생했다.

보고서에 담긴 ‘보편적 복지’ 및 ‘보편주의’ 원칙이 오랜 전쟁으로 고생했던 영국인의 마음을 달랬던 까닭이다. 게다가 국가가 전 국민의 생활수준을 보장하겠다는 내용은 전쟁으로 멈췄던 국가 제도가 부활하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베버리지는 당시 영국이 자산조사에 기초해 빈민층과 산업노동자만 책임졌던 가운데, 자산조사 없이 더 광범위한 계층의 인구를 복지 수급 대상으로 설정하는 보편주의 원칙을 주장했던 것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어구는 베버리지의 표현이다? (O / X)

베버리지 보고서는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어구와 늘 붙어 다닌다. 이는 한 신문사의 기사로부터 비롯됐다. 1942년 12월 2일 신문사 ‘데일리미러’에서는 “베버리지에게 궁핍의 해소 방법을 듣다”라는 제목하에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계획”이라는 소제목을 달아 보고서 출간 소식을 알렸다. 하지만 해당 표현이 보편적 복지의 상징적 어구로 유명해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가 1943년 3월 라디오 방송에서 언급한 이후였다. 그는 사회보험 제공의 필요를 강조하고자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1942년 12월 2일자 '데일리미러'에 보도된 '베버리지 보고서 출간 기념' 기사 지면 원문  [사진=사회평론아카데미]
1942년 12월 2일자 '데일리미러'에 보도된 '베버리지 보고서 출간 기념' 기사 지면 원문 [사진=사회평론아카데미]

그러나 처칠은 사회보험의 강제가입과 같은 지나친 국가개입에 반대하며, 국민 선택의 자유를 지지했다. 당시 보수당의 처칠 내각은 “정부의 재정 부담이 커 현실적으로 실행 불가능하다”고 즉각적 이행을 거부하고, 일부 공약은 비현실적이라며 재논의를 못 박았다. 보편적 복지에 소극적인 보수당 내각에 반발한 대중은 1945년 총선에서 클레멘트 애틀리가 이끄는 노동당의 편에 섰다. 결국 처칠 총리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음에도 불구, 베버리지 보고서에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명언만 안겨준 채 전쟁영웅은 힘없이 무너졌다.

 

이렇듯 복지국가의 토대를 만든 베버리지는 영국 범부처와 함께 베버리지 보고서를 완성했다. 발간 직후 여론조사에 따르면 폭발적 인기를 받은 보고서는 영국 국민의 95%가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그 인기와 명성은 현재까지 이어져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부제와 함께 2022년 ‘베버리지 보고서 한국어 번역판’이 출간됐다. 그의 생애와 업적에 관한 비하인드는 책을 통해 또다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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