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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인물iN] 전쟁고아의 어머니, 의식주 급한 와중에서도 놓지 않았던 목표는?

  • kaka2***
  • 2023.07.25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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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복지인물iN’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복지에 감사하며 복지와 관련된 인물의 업적, 비하인드 등을 알아보는 코너입니다. 새롭고 흥미로운 소식으로 매주 찾아오겠습니다. 복지의 여정으로 함께 떠나볼까요?]


전쟁고아를 보살피고 있는 황온순 여사 


1950년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어가던 한반도. 서울의 전쟁고아들은 미 공군의 헬기 수송 작전을 통해 제주도에서 연고 없는 피난생활을 시작했다. 아무도 모르는 외진 곳의 한 농업학교로 대피는 했지만, 그들은 적합한 운영자가 없어 매 끼니를 챙겨 먹는 일이 부담이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탁아소 등에서 10여 년 이상 아동을 보호한 경험이 있는 황온순(1903~2004) 여사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부산서 피난살이를 하던 그는 하나뿐인 외아들이 실종돼 생사조차 알지 못하는 고통을 겪던 중이었다. 그런데도 “아들 하나는 잃었지만 천 명의 아들을 돌봐 달라”는 제안을 수락했다. 한국보육원 황온순 원장은 이곳에서 아이들에게 딱 한 가지를 강조했다. “성숙한 인격을 갖고 자력 생활을 할 것” 전쟁고아의 어머니로서 황 원장이 제공했던 교육과 경험은 그들을 사회인으로 성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자력 생활의 기본은 교육에서, 다양한 학습의 터를 마련해

천 명의 아이들은 황 원장을 만나고선 삶이 확연히 달라졌다. 그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물고기를 낚는 법’이라고 믿었다. 구호 지원을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을 갖게 해주고 싶었다. 그 첫 단추가 교육이었다. 황 원장은 보육원 내부에서도 다양한 교육과 특별활동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처음엔 천막에서 먹고 잤던 터라 교육 환경이라고 좋을 리 없었다. 교구도 없고 선생님도 부족했다. 게다가 학생들의 나이는 갓난아기부터 청소년기까지 다양하게 분포해 교육의 범위도 넓었다. 이런 악조건에도 한국보육원의 교육은 체계성을 갖췄다. 원생들은 40~50명씩 나이와 성별에 따라 꽃이나 새 명칭으로 반이 구분됐다. 
특히 선택과 집중도 확실했다. 자체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초등학교 과정만 내부에서 교육하고, 고도화된 수업이 필요한 중학교나 이후 상급학교는 외부로 통학하는 결단이 내려졌다. 황 원장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경영 위기에도 교육의 기회를 보장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의 신념은 18세에 달하면 보육원을 떠나 자활해야 하는 아이들을 위해 끝까지 지켜져야만 했다.
교육 편성은 정규 교과목을 넘어 예체능 분야도 준비돼 있었다. 그는 원생들이 자기 소질을 확인하도록 브라스밴드, 국악, 승무 등 특성화 교육도 마련했다. 그 중에서도 브라스밴드는 1953년부터 유엔 장병들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30회 이상 연주하면서 제주도의 명물이 되기도 했다. 

진정한 교육은 아동시에서 거주했던 경험으로 채워

한국전쟁은 끝이 났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궁핍했다. 아이들도 이 험난한 세상을 혼자서 일어서야만 했다. 이를 위해 황 원장은 미리 사회를 경험해 볼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한국보육원만의 헌법인 ‘아동시’를 창설해 민주주의 교육을 실시했다. 아동시는 원생들의 원활한 사회복귀를 지원하고자 만든 자치 기구다. 
“우리 한국보육원 아동시는 우리 대한민국 역사 이래 처음 발족하는 아동시로서 여러분이 민주주의를 배우고 익혀서 장차 훌륭한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 장관이 되어 주리라는 큰 꿈을 안고, 참 기쁘고 벅찬 마음으로 여러분을 축하하고 격려합니다. 아무쪼록 아동시가 무궁한 발전을 하여 참 민주주의를 배우는 좋은 도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아동시 헌법 아래에서 범부처와 문화기관 등 모든 시민이 협업하는 공동체 생활을 만들어 나간다. 실제와 매우 흡사하게 시장과 부시장, 국회의원, 장관들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예컨대 재정부는 은행권을 발행해 아이들에게 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지불한다. 헌병대는 싸움, 도둑질 등을 범한 아동에게 벌을 주거나 청소를 시킨다. 무엇보다 아동시 국회의원들이 시민들의 불편 사항을 건의하면 황온순 원장은 이들의 요구를 수용한다. 이처럼 아동시는 원생들이 사회를 자연스레 접하도록 운영됐다.
사회 적응력 향상을 위한 그의 노력은 보육원 안팎으로 이어졌다. 그는 지역 내 주민들과 소통에도 애썼다. 제주도 내 사회사업단체가 주최하는 보육아동연합체육대회에 참석하고, 예술제도 개최해서 다른 친구와 어울리도록 환경을 조성했다. 서울로 보육원을 이주한 후에도 보이스카우트 활동으로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질을 함양할 수 있는 경험이 계속 제공됐다.


최근 초등학교 교사가 아동시와 비슷한 형태의 학급경영을 운영해 학부모들의 주목을 끈 바 있다.  해당 교사가 사비로 학급경영을 운영하게 된 계기는 전쟁고아의 어머니였던 황 원장의 신념과 유사했다. 바로 실질적인 교육과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의 오랜 꿈은 이런 기회를 통해 아이들이 사회인으로 성장하는 일이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보육원을 넘어 훗날 휘경동에 직업전문학교를 설립했다. 황온순 원장은 마지막까지도 자력생활 목표를 향해 달린 진정한 교육자였다.

  • tora_je*** 2023.07.26 14:35
    가슴 뭉클하네요. 요즘 교권 추락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생각이 많아지는 글입니다.
    tora_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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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isungp*** 2023.08.10 09:57
      사실 교육현장에서 지금도 고생하시는 선생님들 너무나 많은데, 언론 등에서 너무 극단적인 모습들만 비춰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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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인물iN] 전쟁고아의 어머니, 의식주 급한 와중에서도 놓지 않았던 목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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