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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인물iN] 한센인의 아버지, “생존 아닌 생활을 선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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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17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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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복지인물iN’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복지에 감사하며 복지와 관련된 인물의 업적, 비하인드 등을 알아보는 코너입니다. 새롭고 흥미로운 소식으로 매주 찾아오겠습니다. 복지의 여정으로 함께 떠나볼까요?]

 

이경재 신부(1926~1998, 세례명 알렉산더)
과거 우리나라 전남 고흥군의 작은 섬 소록도에는 ‘한센인’이 모여 살았다. 당시 한국을 지배하던 일본은 ‘근대화한 선진사회’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문둥병’, ‘나병’으로 불렸던 한센병 환자를 사회로부터 격리했다. 차별은 광복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질병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세상의 편견 속에서, 그들은 이경재 신부(1926~1998, 세례명 알렉산더)를 만나기 전까지 병과 굶주림으로 고달팠다.

한센인을 구호하는 ‘구라사업(救癩事業, 나환인 구제)’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이 신부는 평생을 ‘성라자로 마을’에서 한센인을 치료하고, 그들의 사회복귀를 돕는 데 앞장섰다. 전파력이 높은 감염병이라 오해받던 시절, 그는 나환자들에게 “생존 아닌 생활을” 선물하고 싶었다. 이 소명 의식 덕분에 그는 ‘국제 거지’라는 호칭을 얻기도 할 정도였다.

 

알렉산더가 유독 한센인이 눈에 밟혔던 까닭은?

성라자로 마을 전경 [사진=성자라로 마을]

구라사업이 적극 펼쳐졌던 성라자로 마을은 외국인 신부가 1950년 개소한 한센인 요양소다. 그곳은 창고로 보이는 판잣집 몇 채밖에 없는 황량한 산기슭이었다. 추운 겨울날 수원성당의 임시 보좌였던 이경재 신부는 성가대를 이끌고 이 마을로 미사를 가면서, 비참하게 살아가던 한센인 가족을 마주했다. 감염의 위험에도 거리낌이 없던 그는 100명이 넘는 환우를 안아주며 보살폈고, 이 첫 만남이 그의 인생을 바꿀 것을 직감했다.

“내 생전에 처음 나환자를 본 것이다. 무서움은 하나도 없었다. 20평 정도의 텐트 성당에서 나환우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올렸다. 일주일 후 그들은 다시 찾아와 성라자로 마을로 아주 들어와 달라는 제의를 했다. 너무 뜻밖의 제의였다. 그 후 그 말을 잠시도 잊을 수 없었다.”

이 간절한 요청은 이 신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신학생 시절, 그는 나환자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보살피다, 결국 나병에 걸려 사망한 다미안(Damien) 신부의 전기를 읽고 많은 감동을 받은 적 있었다. 그에게는 다미안 신부처럼, 한센인을 도울 기회였다.

한센인을 향한 열정은 교구 변경을 신청할 정도였다. 한국전쟁으로 피신 중이던 대주교에게 청원을 거듭한 끝에 1952년 4월 이재경 신부는 갈망하던 성라자로 요양원의 초대 원장으로 부임 받았다. 스물여섯의 어린 나이였던 그의 한센인 구호사업은 하루를 힘겹게 살아냈던 한센인 원생들에게 인간의 품위와 존재 의미를 일깨워 주며 시작됐다.

 

‘라자로 돕기회’가 마을의 성장발판이었다

그러나 부임 2년도 지나지 않을 무렵 이재경 신부는 소명을 다하지 못한 채 성라자로 마을을 떠나야만 했다. 사람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받았던 일부 한센인 원생이 퇴출을 요구했고, 결정적으로 결핵으로 건강이 악화해 더 이상 이 마을에서 원장을 역임하기가 어려웠다. 힘든 투병생활을 마친 후 알렉산더는 건강 회복 후 발령받았던 미국에서도 여전히 그들에게 돌아와 평범한 삶을 일깨워주고 싶었다.

이 신부는 70년 12월 귀국하자마자 “구라사업에 헌신하겠다”는 집념으로 다시 성라자로 마을을 자원했고, 17년 만에 원장으로 재부임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 그곳은 변함없는 황무지였다. 결국 그는 ‘라자로 돕기회’를 조직해 마을 개혁과 한센인 돕기 사업을 단행했다.

기금 마련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후원자를 모집하러 김포공항을 150여 번은 들려야만 했다. 한번 미국에 나갈 때면 그는 30여 개 도시를 다녔다. 나환우를 위해 단 한 푼이라도 더 모금하고 싶었던 그는 ‘국제 거지’로 불렸어도 행복했다. 이재경 신부가 2만여 명의 후원자를 찾은 덕분에 부임한 지 9년 동안 마을 곳곳에 오락실 ‘다미안의 집’, 숙소 ‘반석의 집’ 등 15개의 신축물이 들어선 까닭이다.

이처럼 사람이 사는 곳답게 변모한 성라자로 마을은 아니꼬운 시선을 받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환자를 위한 공간이 “너무 사치스럽다”고 비판했다. 이 신부가 마을 내에 성당을 새로 짓고, 낡고 노후한 마을과 다양한 지원 시설을 확충한 것에 반기를 들었다. 반면 한센인의 아버지였던 그는 “좋은 공간에서 치료하고 쉬어야 병도 빨리 낫겠다”고 역설했다.

  

‘한센인과 생활’이 축복이었던 이재경 신부의 일대기는 ‘소명 의식’이 돋보였다. 한센인은 “병을 옮긴다”는 두려움에 핍박의 대상이었다. 누구나 피하고 싶은 감염병의 위험에도 거리낌이 없었던 그 모습은 참된 돌봄 제공자의 자세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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