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대학교 전경. [사진=강남대학교]
1947년 강남대학교에 부임한 김 교수는 사회사업학과 신설 준비를 시작했는데, 당시 한국은 사회복지 교육의 불모지였다. 연세대학교 신학과나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사회사업학과 등에 사회사업개론이라는 과목이 개설되어 있었을 뿐, 독립적인 사회사업학과는 어느 대학에도 없었다. 사실 언급된 대학에 개설된 사회사업개론 역시도 그가 해당 학교에서 직접 강의했던 과목들이었다.
그는 미국, 일본 등 해외 사례를 참고하면서도 국내 사정에 맞는 독창적인 교과과정 개발을 위해 애썼다. 개별사회사업(case work), 집단사회사업(group work), 지역사회조직(community organization)과 같은 전문 교과목이 그 고민의 결과물이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터졌다. 교육과정 개발 3년 차에 접어들 무렵 전쟁이 발발하자 결국 그는 부득이하게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부산에서도 청년봉사단 YMCA의 일원으로 활동했던 청년 김덕준은 “전쟁 이후 발생할 많은 구호대상자를 효율적으로 지원 관리하기 위해 사회복지사 육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1951년 부산일보에 강남대학교 사회사업학과 학생 모집 광고를 냈다. 이로부터 2년이 지난 1953년 문교부(현 교육부)로부터 사회사업학과 인가를 받아낸 끝에 학과를 창설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제1회 사회사업학과 신입생은 부산 분교로 입학했다. 강만춘(전 강남대 교수), 김운초(전 한국사회개발연구원장) 같은 이들이 첫 입학생이다.
이 밖에도 이곳의 입학생은 국내의 유명 복지 인사를 여럿 배출했다. 1954년에는 사회복지법제론을 집필한 김만두(전 강남대학교 교수), ‘사랑의 빵’ 저금 운동의 주역 이윤구(전 인제대 총장), 그룹 홈 사업으로 아동 돌봄의 패러다임을 바꾼 김종태(아동생활시설 사회복지법인 평화의 마을 원장) 등을 신입생으로 맞이했다. 이들은 모두 1세대 사회복지사다.
‘롤모델 가가와’를 따라 걷던 그의 교육 열정도 빛나
김덕준 교수의 가족에 따르면 그는 노벨평화상 후보에도 올랐던 ‘가가와 도요히코’의 책과 강연을 듣고 사회사업의 꿈을 키웠다. 가가와는 아픈 몸에도 빈민구제사업, 농민조합이나 생활협동조합의 리더로 활동한 인물이다. 그가 일본의 도시샤대학교에 진학한 이유도 가가와 교수가 교수진에 속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