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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어 딕스(Dorothea Dix, 1802–1887). [사진=미국국립의학도서관(NLM)]
[요양뉴스=박지성 기자] 1800년대 초반 미국에서 가난한 정신질환자는 방치됐다. 가정에서 돌볼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악화된 이들은 부족한 시설에 정신병원이 아닌 교도소로 수감되고, 관리자의 권력에 유린당하는 일이 많았다.
도로시어 딕스(Dorothea Dix, 1802–1887)는 정신질환자에 대한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신체적 구속을 비판했다. 생생하고 충격적인 묘사로 학대의 존재를 알리면서 그는 정신병원 설립과 치료 계획 수립을 촉구했다. 이어 개인의 정체성을 존중받으면서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정신치료모델(도덕적 치료)를 지지했다. 덕분에 정신질환자들은 미국 교도소에서 탈출할 수 있었고, 정신병원이 대량 건립됐다.
교도소에 갇힌 정신질환자의 아픔에 주목해
본래 도로시어는 정신질환자의 처우에 관한 개혁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과거에는 여성이 남성과 같은 수준으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신념 아래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초등학교와 중등학교를 설립했다. 교육자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끈 책도 출판하는 등 교육자로서 몰두한 그는 언젠가부터 전반적인 피로 누적으로 우울증을 앓게 되었다. 그러자 죽음에 대한 생각에 사로 잡혔다. 그의 이런 경험은 정신적으로 불안하거나 미친 사람으로 진단받은 정신질환자에 관심을 쏟는 계기가 됐다.
그는 새로운 사람들과 교류하며 관심을 더욱 키워갔다. 도로시어는 미국에서 교사 경력을 정리하고 요양하러 유럽으로 떠났는데, 영국에 머물던 그는 교도소 인권 혁신을 시도한 엘리자베이스 프라이와 영국의 한 정신병원 창립자인 새뮤얼 튜크를 만났다. 이들은 각각 여성 수감자의 성 착취 문제나 정신질환자의 치료법에 주목한 인물이었다.
이 두 명과의 만남은 도로시어가 1841년 미국 보스턴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이스트 케임브리지 교도소에서 여성 수감자들에게 예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자원하는 동인이 됐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교육을 듣는 수감자들이 가난한 환경에서 자신들을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교도소에서 보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신질환자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벽에 묶여있는 모습. [사진=미국국립의학도서관(NLM)]
특히 도로시어는 자신처럼 우울증을 겪었던 이들과 정신질환자가 비인도적인 방치 속에서 지내게 된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들은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모두 같은 공간에 내버려졌는데 어둠 속에서 옷이 벗겨진 채로 있었다. 위생은 당연히 담보할 수 없었다. 또한 난방도 돌아가지 않아 매우 추운 겨울을 보내야 했는데, 정신질환자는 온도에 둔감해서 난방도 필요없다는 논리였다. 일부는 벽 쇠사슬에 묶인 채로 채찍질을 당하곤 했었다.
깊은 충격을 받은 도로시어는 다른 정신질환자들도 이런 비인도적인 대우를 받으면서 살아가는지 알아보기로 결심했다.
주 의회 설득으로 정신질환자 치료 약속 받아내
이런 결심 이후 2년 가까이 그는 자신이 거주하던 매사추세츠주 전역의 교도소와 구빈원을 돌아다니며 정신질환자의 상태와 치료를 기록했다. 그러면서 도로시어는 앞서 경험한 케임브리지 교도소가 예외적 사례가 아니라 업계의 일반적 관행임을 깨닫고 경악했다.
그는 학대 현장을 고발하면서 우스터 정신병원 규모 확대를 위한 기금 확보를 요청하는 내용의 청원서를 주의회에 제출했다. 도로시어는 “정신질환자들이 사슬에 묶이고 벌거벗고 막대기로 맞고 복종하도록 채찍질 당하고 있다”며 시설의 수용 인원을 늘리고 교도소와 구빈원 관리자의 비인도적인 관행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별적인 공간에서 활동하며 밝은 분위기에서 일상을 보내고, 종교적 교육이나 지적 자극을 받는 등의 돌봄 환경 조성을 중요시한 것이다.
그의 청원 내용은 여러 의원의 연설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일부 지역신문은 그의 진술에 의문을 제기하고 교도소와 구빈원 기관장은 강력히 반발하기도 했으나 그의 첫 번째 호소는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했다. 주 의회는 우스터 정신병원에 대한 자금 지원을 크게 늘렸다. 이로써 우스터 정신병원은 정신질환자에게 회복적 치료 제공을 약속한 미국 최초의 정신기관 중 하나가 되었다.
도로시어 딕스의 노력으로 1848년 뉴저지주 트렌턴에 건립된 뉴저지 주립 정신병원. 1887년 그는 이곳에서 사망했다. [사진=미국국립의학도서관(NLM)]
그의 두 번째 호소는 주 의회가 아니라 연방 정부 차원의 정신병원 건립이었다. 1948년에 그는 연방 차원에서 서울시 면적(605.2km²)의 약 33배에 해당하는 약 2만 제곱킬로미터를 정신병원 건립과 정신질환자를 돌보는데 사용하자는 내용을 의회에 제안했다. 1854년 마침내 이 법안은 통과됐지만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꾸준한 노력 덕분에 50개 주 중 15개 주 의회가 정신질환자 인도적 대우 법안을 통과시켰고, 32개의 주립 정신병원 설립을 이뤄냈다.
정신건강 개혁자로서 도로시어의 활동은 정신질환자들의 삶 개선과 미국, 캐나다, 스코틀랜드에서 정신 건강 관리 기준 확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가 없었다면 정신질환자는 여전히 교도소에 수감되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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