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뉴스=가순필 기자] 지팡이와 기저귀, 보청기와 안마의자.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노인용 매장’이라고 하면 이런 제품을 파는 곳을 떠올리기 쉬웠다.
최근 중국에서는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노인이 필요한 물건을 사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떻게 살고 먹고 여행하고 집을 고칠지까지 직접 체험하는 ‘실버 소비공간’이 곳곳에 생기고 있다.
중국 경제일보에 따르면 2025년 중국 실버경제 산업 규모는 약 9조 위안으로 추산되며, 2035년에는 30조 위안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의 60세 이상 인구는 지난해 말 기준 약 3억2300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23%를 차지한다.
집을 ‘직접 살아보고’ 고친다
베이징에서는 노인이 집을 어떻게 바꿀지 직접 체험하는 공간이 늘고 있다.
베이징시는 2024년부터 고령친화 주거개조를 위한 공공 샘플하우스를 조성하고 있다. 현재까지 33곳이 계획됐고, 이 가운데 25곳은 이미 문을 열었다.
샘플하우스에는 미끄럼 방지 바닥이나 손잡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높이를 조절할 수 있는 주방가구, 전동 침대와 소파, 음성으로 작동하는 커튼과 수납장, 낙상 등을 감지하는 센서까지 실제 가정처럼 꾸며져 있다.
카탈로그를 보고 제품을 주문하는 대신 직접 앉아보고, 열어보고, 움직여본 뒤 내 집에 필요한 것을 고르는 방식이다.
베이징 마쥐차오 고령친화 주택 샘플하우스 욕실 (사진=소호)상하이 쇼핑몰엔 ‘실버 상점’
상하이에서는 아예 일반 상업시설 안으로 실버 소비공간이 들어오고 있다.
푸퉈구에 문을 연 ‘실버 상점’은 약 1200㎡ 규모로, 고령친화 가구와 스마트 보조기기, 건강식품, 기능성 의류, 문화·여가 제품 등을 전시한다. 고령자 생활에 맞춰 꾸민 주택 체험공간과 복지용구 대여·상담 공간도 함께 운영한다.
지역 내 다른 실버 생활관은 140㎡ 공간에 500여 종의 제품을 갖추고 제품 구매부터 주택개조 체험, 보조기기 대여까지 한곳에서 제공한다.
이곳의 특징은 ‘노인용품 판매점’이라는 느낌을 줄였다는 데 있다. 쇼핑몰에서 옷이나 가구를 고르듯 고령자도 직접 제품을 써보고 선택하게 한다.
중국 상하이 푸퉈구의 실버상점 내부 모습, 노인들이 실제 생활공간에 꾸며진 공간에서 각종 제품을 체험할 수 있다. (사진=상해보타오)식사·여행·미용까지 ‘노인을 위한 거리’
선전에서는 더 나아가 아예 노인 중심의 생활상권을 만들고 있다. 중국 정부가 추진하는 ‘15분 생활권’ 정책에서는 고령자 생활서비스를 한데 모은 ‘실버거리’ 조성이 새로운 상권 모델 가운데 하나로 제시됐다.
실제 선전의 실버 상권에는 노인식당과 재활·물리치료, 여행·장기체류 상담, 미용·수선 등 다양한 서비스가 모여 있다. 항저우에서는 AI와 스마트 돌봄기기를 직접 체험하는 노후생활 종합공간도 등장했다.
노인에게 필요한 물건을 한곳에 모아 파는 수준을 넘어 식사하고, 건강을 관리하고, 여행을 계획하고, 새로운 기술을 체험하는 생활공간으로 바뀌고 있는 셈이다.
‘부양받는 노후’에서 ‘즐기는 노후’로
최근 중국에서는 고령자의 삶을 바라보는 표현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노후를 가족이나 사회의 부양과 돌봄을 받는 시기로 보는 시각이 강했다면, 최근에는 노후에도 여행하고 배우고 취미를 즐기며 자신의 취향에 적극적으로 돈을 쓰는 삶이 강조되고 있다.
중국 언론도 고령층 소비가 건강과 돌봄을 넘어 여행·문화·교육·취미와 자기만족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런 변화는 매장의 모습도 바꾸고 있다. 예전 노인용 매장이 몸이 불편해진 뒤 필요한 제품을 사는 곳이었다면, 최근 등장하는 실버 상권은 건강할 때부터 앞으로의 생활방식을 고르고 경험하는 곳에 더 가깝다.
한국도 65세 이상 인구 1000만명 시대에 들어섰지만 고령친화 소비공간은 복지용구 매장이나 의료·건강 관련 제품 판매점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중국에서 등장하는 실버 상권이 그대로 한국에 적용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다만 노인을 ‘돌봄을 받는 사람’만이 아니라 여행하고 배우고 꾸미고 소비하는 생활자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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