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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인물iN] 사회 문제 해결사 ‘제인 애덤스’…1세대 사회복지사

  • seraday06***
  • 2024-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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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민자 넘쳐나자 ‘헐하우스’ 세워  
전쟁 발발하자 비폭력 평화 운동 전개

 

[편집자주: ‘복지인물iN’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복지에 감사하며 복지와 관련된 인물의 업적, 비하인드 등을 알아보는 코너입니다. 새롭고 흥미로운 소식으로 매주 찾아오겠습니다. 복지의 여정으로 함께 떠나볼까요?]

 

 
제인 애덤스. [사진=스워스모어 대학 평화 컬렉션(Swarthmore College Peace Collection)]


사회복지학문은 사회사업을 사회학과 접목하면서 발전해 왔다. 이 가운데 사회복지사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발견하고 관련 사회문제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중책을 맡고 있다. 빈부 격차, 노인 빈곤 확대 등 사회 위기를 맞이하는 우리 공동체에서 사회복지사의 역할은 더욱 중대해지고 있으며 우리 생각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될 전망이다.  

 

실례로 과거 미국의 사회개혁가 제인 애덤스(Jane Addams, 1860~1935)는 빈민층, 제1차 세계대전과 같은 당시 미국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데 헌신하면서 많은 것을 이뤄냈다. 특히 제인 애덤스의 활동으로 시카고 슬럼가는 이민자들과 여성들이 차별받지 않고 교류할 수 있는 중심지로 변화했다.

 

갈 곳 없는 빈민들 정착지 만들어줘

 

제인 애덤스는 미국 일리노이 주에 있는 락포드 여성 신학교(Rockford Seminary)를 다녔다. 그는 딱히 종교에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남을 위해 봉사하는데 흥미를 느꼈다. 그러던 도중 유럽 여행에서 애덤스는 런던 이스트 앤드의 빈곤 원인을 찾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토인비 홀(Toynbee Hall)를 보게 된다.

 

썩은 야채밖에 구입할 수 없던 빈민들이 토인비 홀에 줄을 서서 신선한 음식을 제공받는 장면은 그녀의 뇌리에 각인됐다. 애덤스는 공업지역이었던 이스트 앤드를 목격하고 미국의 공업도시인 시카고를 떠올렸다. 그 무렵 시카고는 30년 만에 인구 10만 명에서 100만에 달하는 현대 도시로 급성장했다. 이 때문에 가난한 이민자들이 시카고 인구의 80%를 차지했을 정도였고, 그들 중 다수는 도시 인구 밀집과 산업화로 어려움을 겪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애덤스는 미국의 토인비 홀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1889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친구와 함께 비어 있는 시카고의 저택을 임대하면서 실행에 옮겼다. 이 건물은 찰스 헐(Charles Hull)의 이름을 따와 ‘헐 하우스(Hull House)’라고 불렸다. 이는 북미 최초의 이주민 정착지로서 현재의 사회복지관과 유사한 ‘커뮤니티 센터’였다.


제인 애덤스가 헐 하우스 방문객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 [사진=더노벨프라이즈(The Nobel Prize)]


헐 하우스의 설립 목표는 빈민 등 시카고 지역의 문제를 조사하고 교육 및 자선사업을 통해 지역사회를 더욱 발전시키는 데 있었다. 엄마들이 일하는 동안 남겨지는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해지자 제인 애덤스는 유치원, 보육원, 공공 체육관을 제공했다. 이민자 계층의 미국 사회 적응을 돕기 위해 음악 및 미술 수업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지원하기도 했다.

 

애덤스는 헐 하우스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일을 할 수 없었던 1세대 여대졸자들의 사회 진출을 도왔고, 이민자들이 미국에서 쉽게 적응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시카고 슬럼가가 미국의 세 번째 대도시로도 성장하게 된 요인 중에는 이런 그녀의 노력도 숨어 있었다.

 

여론 의식하지 않고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 반대해

헐 하우스는 시카고 슬럼가를 넘어 미국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미국 사회복지기관의 본보기가 되었다. 덩달아 애덤스 역시 사회복지 전문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면서 더 넓은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이민자와 흑인에 대한 사법제도 정립, 노동자 보수 및 근로 환경 개선, 여성 참정권 확대 등에 목소리를 높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애덤스는 미국 참전을 공개적으로 반대하기도 했다. “저는 미국에 이민 온 여러 나라 사람이 서로 이해하면서 형제처럼 지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국가와 국가도 서로 이해하고 힘을 합친다면 전쟁은 필요 없을 것입니다.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습니다. 이들이 왜 죽어야 합니까? 전쟁으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을 위해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발언은 실로 여파가 컸다. 그녀는 미국 혁명의 딸들(Daughters of the American Revolution)이라는 명예의 전당에 올랐었으나, 전쟁 반대 목소리로 명단에서 제명되는 등 언론의 질타를 심하게 받았다.


평화와 자유를 위한 국제여성연맹 집행위원회. [사진=더노벨프라이즈(The Nobel Prize)]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평화와 자유를 위한 국제여성연맹(WILPF)’을 조직하는 등 전쟁 반대와 평화를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전쟁의 참극과 대공황과 같은 사회 문제가 발생하면서 제인 애덤스의 평화론은 약 15년이 지나서야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녀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3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기에 이르렀다.

 

제인 애덤스는 이민자, 여성, 어린이 등을 대상으로 한 커뮤니티 센터, 헐 하우스를 시작으로 점차 다양한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그녀의 삶은 사회복지사 역할이 얼마나 중차대한지를 시사하고 있다. 개인과 가족의 사례에게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사회문제를 큰 틀에서 고민하고 대응하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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